과천성당

천주교 수원교구

굿뉴스 매일미사 페이지에 올라온 묵상글 서 공석 신부님의 강론(부활 제3주일 2018년 4월 15일)입니다.

부활 제3주일 2018년 4월 15일.루가 24, 35-48.

오늘 복음은「루가복음서」가 전하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발현 이야기들 중 하나입니다. 예수님이 나타나시자 제자들은 “무섭고 두려워 유령을 보는 줄로” 생각하였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당신의 손과 발을 보여 주시며, “바로 나다. 나를 만져 보아라. 유령은 살과 뼈가 없지만, 나는 너희도 보다시피 살과 뼈가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당신이 유령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 구운 물고기 한 토막을 그들 앞에서 잡수셨습니다.

각「복음서」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발현 이야기를 한두 가지씩 전합니다. 그러나 그 이야기들을 살펴보면, 발현 정황(情況)이 일치하지 않습니다. 각「복음서」가 각기 나름대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부활이 모든 사람 앞에서 확인된 객관적 사실이 아니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인간이 하느님의 존재를 눈으로 확인할 수 없듯이, 부활하신 예수님도 사람들이 확인할 수 있는 대상(對象)이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부활과 발현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었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예수님이 유대교 당국으로부터 체포되어 십자가형으로 돌아가시자 실망하여 각자 갈릴래아의 고향으로 돌아간 제자들입니다. 부활하신 분이 어떤 방식으로 그들에게 발현하지 않았으면, 그들이 다시 모여들지도, 예수님의 부활을 선포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확신을 갖게 하는 계기가 그들 각자에게 있었던 것입니다.

복음서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중심이 된 공동체들이 예수님에 대해 그들이 믿던 바를 전하기 위해 기록한 문서들입니다. 각 공동체가 그들이 믿던 바를 이야기 양식으로 각각 기록하여 남겼습니다. 그것은 오늘 우리가 사건을 기록하는 방식과는 다릅니다. 현대인은 과거의 사실을 정확하게 재생(再生)하여 기록합니다. 그러나 복음서가 기록될 당시에는 사람들이 각자 자기 방식으로 이야기들을 만들어서, 그 안에 자기들이 전하고자 하는 사실과 자기들의 생각을 담았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복음서들에서 알아들어야 하는 것은 정확한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초기신앙인들이 믿고 있던 사실입니다. 복음서들 안에서 우리는 그들의 믿음을 알아듣고, 우리도 그 믿음에 참여합니다.

오늘의 발현 이야기에서도 우리가 알아들을 것은 부활하신 분에 대한 초기 신앙인들의 믿음입니다. 오늘 복음에는 제자들이 부활하신 분을 확인하는 과정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유령이 아니라, 살과 뼈가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말씀을 듣고, 제자들은 “너무 기쁜 나머지 아직도 믿지 못하고 놀라워” 하고 있습니다. 초기 신앙인들이 부활을 믿게 된 것은 한 순간에 일어난 일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 제자들은 모여서 예수님에 대해 회상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살과 뼈를 가지고 살아계실 때, 그분의 삶 안에 하느님의 생명이 살아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삶에 대해 새롭게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들에게 기쁨이었지만, 또한 믿어지지 않는, 그들을 어리둥절하게 하는 기쁨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제자들의 믿음은 곧 새로운 자각(自覺)과 실천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들은 신앙에 대해 새롭게 자각합니다. “나에 관하여 모세의 율법과 예언서와 시편에 기록된 모든 것이 다 이루어져야 한다.” 오늘 복음이 예수님의 입을 빌려 하는 말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을 여시어 성경을 깨닫게 해 주셨다.”는 말씀도 있었습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예수님을 기준으로 과거 이스라엘의 신앙 문서들을 새롭게 읽고, 새롭게 이해하였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 사람들과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깨달은 모세의 체험에 충실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 함께 계시다는 사실이 왜곡된 유대교 안에서, 그것을 시정하는 노력을 하다가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것은 일찍이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이 한 노력이었고, 또한 그들의 운명이었습니다. 부활은 예수님의 살과 뼈는 죽어도 하느님이 그분과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보여준 사건이었습니다.

모세의 이름으로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율법은 무작정 지키기만 하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율법은 하느님이 우리의 삶 안에 함께 살아 계시도록 살기 위한 지침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율법을 글자 그대로 지키는 데에 정신을 빼앗겨,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잊어버렸습니다. 나무는 보아도 숲을 보지 못한 격이었습니다. 예언자들은 그 잘못 된 생각을 바로잡기 위해 외친 분들입니다. 각 예언자가 처한 시대적, 사회적 상황은 달랐습니다. 그러나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되찾아야 한다는 외침이라는 점에서 예언자들의 부르짖음은 공통됩니다. 예언자들은 하느님을 빙자하여 인간이 인간 위에 군림하는 것에도 반발하였습니다.「시편」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여러 상황에서 체험하고, 그 체험을 시(詩)로 만들어 표현한 문서입니다. 오늘 복음이「구약성서」의 문서들 중「율법서」와「예언서」와「시편」, 이 세 가지를 특별히 언급하는 것은, 그 문서들이 초기 신앙인들이 예수님에 대해 깨닫는 데에 결정적 역할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에 대해 새롭게 인식한 초기 신앙인들은 새로운 실천을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은 말합니다.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 예수님이 가르친 복음은 그분이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온 민족에게 전파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라고 요약하였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실천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사람들이 영접하고, 그분의 생명이 하시는 일을 실천하게 하는 데에 있었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가르친 “하느님의 나라”였습니다. 사람이 율법에 얽매여, 지키고 바치는 일에 열중하면, 성취감은 있어도, 하느님이 함께 계시지는 않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그분의 일을 자유롭게 실천하는 데에 있습니다. 하느님은 용서하십니다. 용서는 인간생명을 소중히 생각하는 마음이 하는 일입니다. 용서하지 않는 마음에는 하느님이 함께 계시지 않습니다. 그 마음은 생명을 미워하고 죽입니다.

오늘 복음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용서라고 요약한 것은 예수님이 믿고 가르친 하느님은 생명을 아끼고, 사랑하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생명을 아끼고, 용서하며, 보살피는 데에 있습니다. 그것이 하느님이 하시는 일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선포되어야 하는” 회개가 있다고 말합니다. 회개(悔改)는 고행(苦行)이나 보속(補贖)이 아닙니다. 사람이 하느님을 향해 돌아서는 행위입니다. 선하신 하느님, 용서하고 보살피는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알고, 그분에게로 시선을 돌려 우리도 그분의 선하심과 은혜로우심을 실천하겠다고 마음 다짐하는 것이 회개입니다. 부활은 그리스도인에게 기쁨입니다. 하느님은 예수님을 단죄하고 처형한 유대교 지도자들과도, 빌라도와도 함께 계시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은 사랑하고 용서하며 죽어 가신 예수님과 함께 계셨습니다. 우리도 사랑과 용서를 실천하여 부활의 증인이 되라는 오늘 복음의 말씀입니다.